이미 <색, 계>에 대한 감평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 블로그가 싸그리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새로 쓰게 됐습니다. 엉엉 TAT 뭐, 그만큼 감동과 여운이 오래간다는 의미일 수도 있으니 좋은 마음으로 쓰려고요. (라고 말하고 '쓰라립니다.'라고 읽습니다.)
<색, 계> 하면 모르시는 분들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거장'이라는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안 감독이 만든 영화라서, 혹은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 사자상을 거머쥔 영화라서,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 언론이 그렇게나 주목했던 '수위'가 너무나도 높은 영화라서. 수많은 이유들로 <색, 계>는 꽤 유명해졌지요.
뭐 어찌됐든 생각보다 <색, 계>는 꽤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단편적인 사실만 갖고도 <색, 계>는 언론이 떠들어 댄 노출에 대한 부분보다는 네러티브나 배우들의 연기와 같은 것들이 더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봅니다. 단지 노출이 많다고 해서 받는 관심은 지극히 잠깐일 뿐이니까요.
영화를 보고 난 제 생각 역시 같습니다. 총 3번의 정사 씬이 나오는데 '야하다'라거나 '심하다'와 같은 생각은 잠깐 안드로메다로 보내도 될 정도로 네러티브에 잘 녹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건 아니지만, 모든 자극적 시각 요소마저 녹일 정도로 이야기와 잘 부합되는 영상이라는 이야기죠. (그런데 정말 노골적으로 묘사를 하긴 하더이다.)
예고편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네러티브의 기본 골격은 너무나도 평범해서 이것만 듣고는 영화에 대한 구미가 전혀 당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스파이가 노리는 대상과 그 스파이가 이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한다는 이야기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보는 내내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끔 합니다. 도대체 무슨 신비한 장치가 있기에 이렇게 할 수 있는건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아무래도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탕웨이가 친일파 퇴치를 위한 반란 부대에 가담하여 작전 수행 중 자신의 심정을 밝히는 부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신은 그를 몰라! 나는 그와 함께 하며 오히려 내가 그에게 빠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고!'라고 외치는 장면이었는데요. 처음엔 스파이로써 접근하기 시작했지만 그의 표적이었던 양조위와 사랑을 나누다 보니 그의 매력에 가랑비 옷 젖듯 빠져든 감정을 애절하게 표현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탕웨이와 양조위가 함께 한 마지막 순간, 다이아몬드 반지를 찾으러 갔을 때. 그때도 참 찡하더군요. 건조하고 시니컬하기 짝이 없는 양조위가 탕웨이를 위해, 자신의 정부인을 위해서도 하지 않았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는 겁니다. 그것도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탕웨이만을 위한, 제대로 된 명품 반지였죠. 하지만 그 시간은 탕웨이가 스파이로써 결말을 낼 수 있는 때였습니다. 즉, 양조위를 죽이기로 약속한 때란 겁니다. 탕웨이는 반지를 보고 양조위에 대한 애틋한 마음의 분출을 느낍니다. 그리고 차마 그를 죽일 수 없음을 깨달았죠. 그에게 지긋이 말합니다. '가요.'
놀라웠던 건 양조위의 결단이었습니다. 그녀를 그냥 죽여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반란군으로써 말이죠. 물론 친일파로써 그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살려 놓는 것은 자신의 직책을 유지하는데 있어서도 크나큰 위험일테고 엄청난 배신감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적어도 멀리 떠나보낸다던가 하는 것 정도는 충분할텐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 감독이, 양조위가 그녀를 죽이기로 선택한 것은 양조위가 느낀 배신감이, 처음으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으나 그 결과의 참혹함이 이루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양조위는 그녀가 죽기 전 머물렀던 자신의 집 내의 방에 앉아서 혼자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침대를 어루만지며. 그의 정부인이 와서 물었을 때 '그냥, 멀리 떠났다고 생각해.'라고 대답한 건 그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녀가 죽었음을 잘 알고 있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있다는 것, 그러나 마음 속 깊이 묻어뒀기에 '멀리 떠났다'는 것. 그런 의미가 아닐까 살며시 추측해 볼 뿐입니다 :)
참 흥미로운 영화였습니다. 이안 감독, 웬만하면 그가 만든 영화는 챙겨볼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정말 '거장'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쓰일대로 쓰인 이야기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테니 말이죠.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P.S 그런데 도저히 이 영화는 티켓 박스에서 표를 구매하기가 두렵더라고요. 무인 발권기로 구매했습니다.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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